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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상대가 보내는 말과 행동이 호감인지 그냥 친절인지 몰라서 혼자 끙끙 앓아본 적 있으신가요. 저도 대학 시절 그랬습니다. 건축학개론은 바로 그 답답함을 스크린 위에 그대로 꺼내놓은 영화입니다. 일반적으로 첫사랑 영화는 아름다운 감정만 남긴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 영화는 오히려 놓쳐버린 순간들을 먼저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영화 건축학개론 포스터
    영화 건축학개론 포스터

    90년대 감성이 소환하는 시대적 배경

    건축학개론의 과거 파트는 199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 시절 소품들이 등장하는 방식이 꽤 촘촘합니다. 삐삐(무선호출기), 무스 머리, CD 플레이어, 필름 카메라, 그리고 게스 로고가 박힌 청바지까지. 여기서 무선호출기란 스마트폰 이전 세대가 사용하던 단방향 통신 기기로, 상대에게 번호를 남기면 전화를 걸어오는 방식이었습니다. 지금 20대 이하 관객에게는 낯설겠지만, 그 세대에게는 저 소품 하나하나가 즉각적인 감정 이입 장치가 됩니다.

    저도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큰 기대 없이 앉았습니다. 그냥 멜로 하나 보는 정도로 생각했는데, 과거 파트가 시작되자마자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스크린에서 풍기는 질감이 달랐달까요. 이건 단순히 옛날 물건을 갖다 놓은 것이 아니라, 그 시절 특유의 느릿하고 서툰 감각을 복원해 낸 것이었습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소품, 조명, 배우의 위치 등을 통해 감정과 의미를 전달하는 영화적 기법을 의미합니다. 건축학개론의 과거 파트는 이 미장센이 특히 잘 작동하는 구간입니다. 삐삐 소리 하나, 낡은 PC 화면 하나가 당시의 정서를 복원하는 트리거(trigger)가 됩니다. 트리거란 특정 감각이나 상황이 과거의 기억이나 감정을 자동으로 불러내는 촉발 자극을 뜻합니다.

    실제로 과거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현재 파트보다 과거 파트가 더 좋은 반응을 얻는 경향은 우연이 아닙니다. 관객은 현재 파트에서 결과를 보고, 과거 파트에서 감정을 겪습니다. 건축학개론은 이 구조를 잘 활용했습니다.

    서연의 시그널 논쟁, 어느 쪽이 맞나

    영화를 본 사람들 사이에서 지금도 가장 많이 오가는 논쟁이 있습니다. "서연이 어장관리를 했다"는 주장과 "승민이 눈치가 없었을 뿐"이라는 주장입니다. 저는 이 둘을 놓고 한쪽이 완전히 맞다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서연이 승민에게 보낸 신호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먼저 말을 걸고, 밥을 먹자고 제안했다
    • 아무도 없는 옥상에 단둘이 올라가 시간을 보냈다
    • 직접 청소한 빈집에 승민을 데려갔고, 생일날을 함께 보냈다
    • 이사한 새 집에 처음 초대하는 손님으로 승민을 불렀다
    • 첫눈 오는 날 특정 장소에서 만나자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일반적으로 이 정도면 충분히 호감 표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지금 저 목록을 보면 당연히 관심이라고 읽힙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건 지금 시점에서 관객으로 보기 때문에 명확하게 보이는 겁니다. 제 경험상 실제 상황 안에 있을 때는 저것들이 단순한 친절인지 호감인지 구분하기가 훨씬 어렵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사후확신 편향(hindsight bias)이라고 부릅니다. 사후확신 편향이란 결과를 알고 난 뒤 과거의 사건이 처음부터 예측 가능했던 것처럼 느끼는 인지 오류를 의미합니다. 관객은 이미 두 사람의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서연의 행동이 전부 신호처럼 보이는 겁니다. 승민의 입장에서는 서연이 강남 선배 재욱과 어울리는 모습도 봤고, "돈 많은 남자랑 결혼할 것"이라는 말도 직접 들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저 신호들을 확신으로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승민이 완전히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빈집에 단둘이 있던 날, 생일날, 이사한 집을 처음 보여준 날, 타이밍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 순간마다 한마디를 못 한 것은 결국 용기의 문제였습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친구들한테 그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건 완전히 관심이었는데"라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이미 다 지나간 뒤였고요.

    사랑에서 타이밍이 작동하는 방식

    건축학개론이 단순한 첫사랑 영화로 소비되지 않는 이유는 타이밍이라는 주제를 중심에 놓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정이 존재하더라도 표현되지 않으면 관계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그 당연한 사실을 꽤 아프게 보여줍니다.

    커뮤니케이션 심리학에서 말하는 상호호혜성(reciprocity) 개념을 여기에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상호호혜성이란 한쪽이 먼저 행동하거나 감정을 드러냈을 때 상대방도 비슷한 방식으로 반응하게 되는 인간의 심리적 경향을 뜻합니다. 서연이 지속적으로 시그널을 보냈음에도 승민이 끝내 반응하지 않자, 서연 역시 결국 다른 방향을 선택하게 됩니다. 감정은 있었지만 그것이 교환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간 것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첫사랑이 생각났다기보다, 놓쳤던 순간들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당시에는 괜히 착각인 척하면 상처받을까 봐 마음을 숨겼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 조심성이 결국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게 한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연애 심리 관련 연구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발견됩니다. 자기노출(self-disclosure), 즉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상대에게 직접 드러내는 행위가 친밀감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반복적으로 확인됩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서연과 승민 모두 자기노출을 충분히 하지 못했고, 그 결과가 15년 후의 어색한 재회로 이어졌습니다.

    영화 제목이 건축학개론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좋은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설계도가 필요하고,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소통이라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집 짓는 이유와 사람을 이해하는 이유가 결국 같다는 것, 영화는 그걸 제목에서부터 말하고 있었던 겁니다.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2005년작 광식이 동생 광태 역시 같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상대의 마음을 짐작하면서도 끝내 먼저 말하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출처: 한국영상자료원).

    건축학개론을 다시 보고 싶어지는 건 첫사랑의 달달함 때문이 아닙니다. "그때 왜 한마디를 못 했을까"라는 질문이 지금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분이라면 현재 파트부터 보지 말고 순서대로 보시길 권합니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구조 안에서 감정의 온도 차이를 느끼는 것이 이 영화를 제대로 경험하는 방법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q3vcT3EQf4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