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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10월 26일, 현직 대통령이 자신의 정보기관 수장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제가 먼저 느낀 건 분노나 슬픔이 아니라 묘한 답답함이었습니다. 역사는 그날 총소리 한 방으로 바뀐 게 아니라, 그전에 이미 한참 동안 망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포스터
    영화 남산의 부장들 포스터

    필름누아르 장르로 읽는 권력의 냄새

    우민호 감독은 이 작품을 필름누아르(Film Noir) 장르로 설계했습니다. 필름누아르란 비도덕적인 인물들이 빛과 그림자가 극단적으로 교차하는 화면 속에서 파멸로 향하는 서사 구조를 말합니다. 음모, 배신, 냉소적인 인물 관계가 중심이 되는 장르인데, 1970년대 말 대한민국 권력의 최정점을 배경으로 삼은 이 작품과 꽤 잘 맞아떨어집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주인공이 처음부터 악인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김재규를 모티브로 한 김규평은 계속 의심받고 밀리고 이용당하다가 서서히 궁지로 몰리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흔히 이런 영화에서 암살자는 냉혹한 계획자로 그려지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그 반대입니다. 암살 계획이 얼마나 허술했는지가 오히려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감독은 영화가 역사적 미스터리를 단정 짓는 도구가 되는 걸 의도적으로 피했다고 밝혔는데, 저는 그 태도가 오히려 이 작품을 더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이유라고 봅니다.

    권력구조 속 충성 경쟁의 민낯

    이 영화에서 가장 씁쓸하게 느껴지는 건 암살 장면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권력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들입니다. 차지철을 모티브로 한 곽상천 캐릭터와 김규평의 관계가 특히 그렇습니다. 예비역 중령과 예비역 중장 사이의 간격, 육군사관학교 출신 여부를 둘러싼 열등감, 누가 대통령 곁에 더 가까이 있는지를 둘러싼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 이게 단순한 영화 속 과장이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

    저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비슷한 공기를 맡아본 적이 있습니다. 정작 중요한 업무보다 윗사람에게 얼마나 잘 보이느냐가 더 중요해지는 순간들, 그 안에서 서로를 견제하고 밀어내는 구조. 물론 규모와 결과는 비교도 안 되지만, 그 냄새가 어딘가 닮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불편하면서도 손에서 놓기 어려웠습니다.

    클라이맥스 직전,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는 대사가 나오는 장면에서 제 기억에는 그게 단순한 충고가 아니라 한 사람의 마지막 경고처럼 들렸습니다. 실존 인물 김재규의 법정 진술을 참고해 만들어진 이 대사는, 배우 이병원이 실제 영상을 보며 머리를 쓸어 올리는 특유의 동작까지 따와 연기한 장면이어서 더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권력구조 속 충성 경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 영화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게 해줍니다.

    • 대통령 곁에 서는 위치가 실질적 권한보다 중요해지는 순간 조직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 정보기관 간의 도청과 감시는 외부 적보다 내부 경쟁에 더 집중되었다
    • 충성을 증명하는 방식이 극단으로 치달을수록 이성적 판단이 사라진다

    역사고증과 영화적 상상 사이에서

    이 작품은 팩션(Faction) 형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팩션이란 사실(Fact)과 허구(Fiction)를 결합한 장르로,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을 뼈대로 삼되 관계와 대화, 심리를 창작하는 방식입니다. 인물들의 이름을 바꾸고 일부 사건의 시간대를 압축하거나 재배열했는데, 이 점이 이 영화를 볼 때 가장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실제 역사와 영화의 차이는 몇 가지 지점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코리아게이트 청문회는 실제로 10.26 사건보다 약 2년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영화에서는 40일 전으로 압축됩니다. 김재규와 박정희의 관계도 영화처럼 가까운 동지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김재규는 육사 2기 출신으로 박정희와 동기이지만, 실제 5.16 군사 정변에는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각색을 두고 보는 관점은 엇갈립니다. 역사 왜곡이라고 보는 분들도 있고, 실증적 사료만으로 담을 수 없는 인간적 맥락을 채운 것이라고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 쪽에 좀 더 기울어 있습니다만, 이 영화만 보고 10.26 사건 전체를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제공하는 사료와 학술적 연구를 병행해서 찾아보는 게 훨씬 입체적인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이 영화가 남기는 찝찝함의 의미

    영화가 끝난 후 속 시원한 느낌은 없습니다. 김재규가 왜 중앙정보부(남산)가 아닌 육군본부(육본)로 향했는지, 감독은 끝까지 답을 주지 않습니다. 어떤 관객은 실수라고 보고, 어떤 관객은 처음부터 계획이 없었던 것이라고 읽습니다. 저는 그 해석을 열어두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정직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필름누아르 장르의 문법에서 주인공은 대개 자신이 설계한 파멸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김규평은 정확히 무엇을 원했는지조차 불분명합니다. 유신체제(維新體制), 즉 1972년 개헌을 통해 대통령에게 무제한적 권력을 부여한 통치 구조에 대한 반발이었는지, 개인적 분노였는지, 아니면 실제 역사에서도 논란이 있듯 충동적 결정이었는지. 영화는 그 모든 가능성을 동시에 열어두고 끝납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이 작품은 개봉 당시 누적 관객 224만 명을 기록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그 수치가 말해주는 건 단순한 흥행이 아니라, 이 찝찝한 이야기를 끝까지 보고 싶어 했던 관객이 그만큼 있었다는 사실일 겁니다.

    결국 저는 이 영화가 권력자 한 명의 몰락을 다룬 이야기라기보다, 그 주변을 감싸고 있던 구조 전체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강하게 남습니다. 나라를 망치는 건 독재자 혼자가 아니라, 그 옆에서 침묵하고 경쟁하고 아부하는 모든 층위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구조라는 것. 역사를 배우는 방식으로 이 영화를 추천하기는 어렵지만, 권력이 어떻게 사람을 바꾸는지를 느끼고 싶다면 한 번쯤 볼 만한 작품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hpk1BlNNZe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