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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그냥 잘 만든 감동 영화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장애인 가족의 고통을 다룬 신파 한 편 정도로 정리했던 거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다시 보니 제가 많이 틀렸더라고요. 2005년 개봉해 5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말아톤은, 단순한 감동 영화가 아니라 한 인간이 자기 방식으로 세상과 접촉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말아톤 사진
    말아톤 사진

    조승우가 초원이를 연기한 방식

    일반적으로 장애인을 연기하는 배우는 특정 행동 패턴을 반복 훈련해 외형을 모방하는 방식을 쓴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조승우의 연기를 자세히 보면 꽤 다릅니다.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란 배우가 역할의 내면 심리와 감정을 실제로 체험함으로써 캐릭터와 동화되는 연기 기법입니다.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에서 출발한 이 방법론은 외형 묘사보다 내면 동기를 중심에 놓습니다. 조승우가 초원이를 연기할 때 선택한 방식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마트에서 벌어지는 프리스타일 댄스, 케첩을 보고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대사, 코를 파다 손가락을 뺄 때 나는 뽕 소리까지, 대사와 행동의 절반 이상이 미리 짜여지지 않은 애드리브였다고 합니다. 감독 본인도 편집 과정에서 몰랐던 디테일을 발견하며 즐거워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을 고르라면, 초원이가 선풍기 앞에 서서 바람을 느끼는 부분입니다. 달리기를 그만두고 직업 교육을 받게 된 뒤, 달릴 때 느꼈던 바람을 선풍기로 대신하려는 초원이의 모습이었는데, 조승우는 그 장면을 읽고 "이게 내 영화다"라고 느껴 출연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저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그 장면이 얼마나 정확하게 초원이라는 사람을 담고 있었는지 다시 이해했습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 Autism Spectrum Disorder)는 사회적 상호작용과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반복적인 행동 패턴을 보이는 신경발달 장애입니다. 이 영화가 고증 측면에서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는 실제 ASD 당사자인 배영진 님의 젓가락질, 특정 숫자에 대한 집착, 감각 반응 방식까지 구체적으로 참고했기 때문입니다. 조승우 배우는 집에서 밥을 먹을 때도 배영진 님의 젓가락질을 그대로 연습했고, 어머니께 혼나기도 했다고 하네요.

    자폐 표현 방식, 영화가 선택한 관점

    영화 속 초원이를 둘러싼 상징 구조를 보면, 감독이 단순히 장애를 소재로 쓴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초원, 비, 얼룩말, 달리기라는 네 가지 모티브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초원이의 내면 세계를 관객이 조금씩 이해하게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불안과 슬픔의 상징이었던 비가 마지막 장면에서 환희로 바뀌는 순간, 관객은 초원이의 감정 변화를 언어 없이도 따라가게 됩니다.

    레인맨(Rain Man, 1988) 이후 자폐 캐릭터가 영화에서 묘사되는 방식에는 하나의 클리셰가 생겼습니다. 레인맨이란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주인공이 특정 분야에서 천재적 능력을 발휘하는 설정의 영화로, 이후 수십 년간 자폐 = 서번트 증후군이라는 고정관념을 만들어냈습니다. 말아톤의 감독은 그 공식을 의도적으로 비틀었습니다. 초원이는 천재가 아닙니다. 365 곱하기 75 같은 계산을 즉석에서 해내는 장면도 있지만, 그것은 초원이가 좋아하는 것에 집중했을 뿐이라는 설정이었습니다. 이 선택 하나가 영화 전체의 품격을 높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한 가지 아쉬움이 남은 것도 사실입니다. 엄마 경숙의 희생과 고통이 너무 크게 부각되다 보니, 초원이의 감정과 욕망보다 가족의 시선에 더 오래 머무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당사자보다 주변인의 고통 서사가 중심이 되는 구조는, 2005년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 기준으로 보면 더욱 아쉬운 지점입니다. 초원이가 스스로 무언가를 원하고 선택하는 장면이 좀 더 많았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국내 등록 장애인 수는 2023년 기준 약 265만 명이며, 이 중 자폐성 장애 등록자는 약 3만 6천 명 수준입니다(출처: 보건복지부). 숫자만 보면 작아 보이지만, 가족 단위로 보면 영향을 받는 사람의 수는 훨씬 많습니다. 제가 실제로 가까이서 봤던 한 가족이 그랬습니다. 아이가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부모는 늘 먼저 사과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 긴장이 몸에 굳어버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때는 그냥 예민한 부모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예민함이 매일 쌓인 보호 반응이었다는 걸 압니다.

    손을 놓아주는 일, 그게 사랑이라는 것

    말아톤에서 가장 복선이 많이 쌓인 장면이 마지막 달리기 장면입니다. 아들의 손을 놓아주는 엄마, 그리고 처음으로 혼자 뛰는 초원이. 이 구조는 영화 초반부터 겹겹이 깔아뒀던 장치들이 한 번에 터지는 방식이었습니다. 의사의 "엄마가 아프면 초원이 기분이 어때"라는 테스트 대사, 손을 잡고 잡히는 장면들, 그리고 "이런 날이 뛰기엔 더 좋지"라는 대사까지 모두 이 한 장면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내러티브 복선(Foreshadowing)이란 이야기의 앞부분에 작은 단서나 암시를 심어두고, 이후 장면에서 의미 있게 회수하는 서사 기법입니다. 말아톤은 이 복선 구조가 상당히 촘촘하게 설계된 작품입니다. 단순히 감동을 만들어내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관객이 초원이의 시간과 함께 걸어오도록 유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순수한 착한 마음만으로 지속될 수 있다는 믿음은 현실과 꽤 다릅니다. 처음에는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크지만, 시간이 길어지면 내 생활도 무너지고 감정도 닳아가는 순간이 옵니다. 그 지점에서 포기가 아니라 방식을 바꾸는 선택, 즉 손을 대신 잡아주는 것에서 스스로 잡을 수 있게 두는 것으로 전환하는 게 얼마나 어렵고 또 필요한 일인지를, 이 영화는 설교 없이 보여줬습니다.

    영화 속 춘천 마라톤 대회 장면은 실제 대회 당일 촬영한 것으로, 참가자만 3만 명이 넘는 대규모 현장이었습니다. 실제 마라톤 코스 구간에 새벽부터 장비를 설치하고 기다렸다가 참가자들이 오면 찍는 방식이었다고 하니, 화면에서 느껴지는 현장감이 그냥 나온 게 아닙니다. 한국 마라톤 대회 운영 방식상 도로 통제가 전제되므로, 조승우 배우는 코스 중간중간을 오토바이로 이동해 가며 촬영했다고 합니다.

    이 영화가 2005년 전체 관람가 등급 국내 영화 흥행 1위를 기록한 건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 가족의 이야기가 이 정도 규모로 스크린에 담긴 건 드문 일이었고,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말아톤에서 초원이 달리기를 잘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2001년 배영진 님, 19세 나이로 마라톤 풀코스 2시간 57분 7초 완주
    • 2002년 철인삼종 경기(Ironman Triathlon) 15시간 6분 32초 완주, 국내 최연소·장애인 최초
    • 영화 말아톤은 이 실화를 바탕으로 2005년 개봉, 500만 관객 돌파

    여기서 철인삼종 경기(Ironman Triathlon)란 수영 3.8km, 사이클 180km, 마라톤 42.195km를 연속으로 완주해야 하는 세계에서 가장 힘든 개인 종목 중 하나입니다. 장애 없는 성인도 완주하기 어려운 종목을 19세 자폐성 장애인이 해냈다는 사실이 이 영화의 실화적 무게를 만들어줍니다.

    저는 이 영화를 지금 다시 본다면, 아마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른 장면에서 멈출 것 같습니다. 초원이가 달리는 장면보다 엄마가 뒷모습으로 서 있는 장면에서, 그리고 정욱이 초원이 신발 끈을 묶어주는 대신 옆에서 지켜보는 장면에서 더 오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사랑이 무엇을 해주는 것에서 무엇을 하지 않는 것으로 이동하는 그 순간들이, 지금의 저한테는 더 크게 남습니다.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은 분이 있다면, 먼저 영화를 보고 나서 제작 뒷이야기를 찾아보시길 추천합니다. 순서가 다르면 영화가 반쪽이 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chlEboYykL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