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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베테랑을 극장에서 봤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화려한 액션을 기대하고 들어갔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남은 건 통쾌함보다 묘한 분노였습니다. 배기사가 조태오에게 당하는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1,300만 관객이 왜 이 영화에 열광했는지, 직접 겪어보니 단번에 이해가 됐습니다.

    영화 베테랑 포스터
    영화 베테랑 포스터

    현실이 스크린에 옮겨온 순간, 분노가 공감이 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자꾸 과거 직장 생활이 떠올랐습니다. 힘 있는 사람 앞에서는 굽신거리다가 힘없는 사람에게만 강하게 나오는 동료를 본 적이 있었는데, 조태오가 딱 그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영화처럼 극단적인 수준은 아니었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상대를 무시하는 방식은 현실에서도 낯설지 않았습니다.

    베테랑이 단순한 오락 영화로 끝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영화는 실제 사건들을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2010년 최철원 전 대표가 1인 시위자를 사무실로 불러들여 임직원들 앞에서 폭행한 사건, 2007년 한화 재벌 3세 보복 폭행 사건 등이 조태오라는 캐릭터와 배기사 에피소드의 뼈대가 되었습니다. 이걸 알고 나서 다시 보니 느낌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단순히 나쁜 재벌 캐릭터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 스크린에 옮겨온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회적 고발 장르를 영화계에서는 흔히 소셜 리얼리즘(Social Realism)이라고 부릅니다. 소셜 리얼리즘이란 현실의 사회 문제와 계층 갈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대중에게 문제의식을 전달하는 창작 방식입니다. 베테랑은 이 소셜 리얼리즘을 상업 오락 영화의 문법 안에 절묘하게 녹여냈다는 점에서 눈에 띄는 작품입니다. 2015년 개봉 당시 한국 박스오피스 연간 1위를 기록했으며, 천만 관객 달성이 이를 증명합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조태오라는 악당이 지금도 기억되는 이유

    제가 직접 봤는데, 베테랑에서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은 건 주인공 서도철이 아니라 악당 조태오였습니다. 이건 단순히 유아인 배우님의 연기력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캐릭터 설계 자체에 비밀이 있습니다.

    영화에서 악역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 악역에게 그럴 만한 배경과 사연을 부여해서 관객이 납득하게 만드는 방식
    • 아무런 설명 없이 순수한 악 그 자체로 그려내는 방식

    조태오는 명백히 후자입니다. 류승완 감독님이 초반에 조태오의 스토리를 넣을지 고민했을 때, 유아인 배우님이 직접 "그냥 나쁜 놈인데, 별다른 설명 없이 가죠"라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이 선택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이 방식을 영화 이론에서는 원초적 악(Archetypal Villain)이라고 합니다. 원초적 악이란 악의 동기나 배경을 설명하지 않고, 악 자체를 인격화한 캐릭터를 의미합니다. 설명이 없을수록 관객이 동정이나 이해를 가질 여지가 사라지고, 결과적으로 캐릭터가 무너지는 순간의 카타르시스가 극대화됩니다. 카타르시스(Catharsis)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개념으로, 이야기를 통해 억눌린 감정을 해소하는 심리적 정화 작용을 말합니다.

    조태오가 더 섬뜩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의 간헐적인 호의 때문이기도 합니다. 배기사의 아이에게 자동차를 선물하는 장면, 엘리베이터에서 타인을 먼저 배려하는 척하는 장면. 이 행동들이 선의에서 우러나온 게 아님을 관객은 알고 있습니다. 그 빈껍데기 같은 친절이 오히려 이중으로 불쾌하게 다가왔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캐릭터가 현실에서도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유형입니다. 나쁜 의도를 착한 척으로 포장하는 사람 말입니다.

    서도철이 주는 안도감, 그리고 판타지 사이의 경계

    서도철이라는 캐릭터는 현실에서 우리가 원하지만 거의 만나기 어려운 이상적 공무원상을 집약해 놓은 인물입니다. 직급이나 관할 경계에 상관없이 부당한 일을 보면 파고드는 사람. 솔직히 현실에서는 이런 사람이 드뭅니다. 저 역시 부당한 상황을 목격하고도 손해가 두려워 모른 척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서도철이 조직의 압박에도 포기하지 않는 장면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영화에서 서도철의 무력은 사실상 세계관 최강에 가깝습니다. 이처럼 주인공이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유하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구조를 내러티브에서 무적 주인공 클리셰(Invincible Hero Archetype)라고 부릅니다. 이 클리셰는 현실적이지 않지만, 관객에게 불안 없이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는 심리적 안전망을 제공합니다. 어지간한 상대는 도철 앞에서 버티지 못하고, 그 때문에 관객은 조태오라는 거대한 악이 등장해도 마음 편히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영화 후반부에서 서도철이 조태오에게 정당방위 성립을 위해 일부러 맞아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서 정당방위(正當防衛)란 급박한 위협에 대응하는 행위로서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는 반격 행위를 의미합니다. 도철은 평소에 필요 이상의 폭력으로 주의를 받아왔기 때문에, 이 조건을 충족시킨 뒤에야 비로소 전력을 다합니다. 이 디테일 하나가 캐릭터의 현실감을 높이면서 동시에 터지는 카타르시스를 더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솔직하게 말하면, 영화 후반부는 다소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개인의 정의감만으로 거대한 재벌 가문과 싸워 이기는 구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비현실성이 이 영화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현실에서 좌절된 감정을 스크린에서 대신 해소해 주는 것, 그게 베테랑이 천만 관객을 넘긴 이유입니다. 실제로 영화 관람이 스트레스 해소와 감정 조절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베테랑을 다시 보면서 든 생각은, 이 영화가 단순한 오락물을 넘어 사회적 분노를 가장 대중적인 방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조태오는 그냥 영화 속 악당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치는 불공정함의 상징이고, 서도철은 우리가 원하지만 쉽게 만날 수 없는 정의의 상징입니다. 그 두 가지가 맞붙는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낀 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지금 바로 켜보시길 권합니다. 다시 보는 분이라면, 실화 배경을 알고 보면 느낌이 완전히 다를 겁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sMpzdgHrI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