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처음엔 그냥 여름 코미디 영화로 봤습니다. 재난 설정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이렇게 손에 땀을 쥐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더 솔직히 말하면, 주인공 용남의 처지가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초반부터 자꾸 마음이 걸렸습니다.

취업 실패한 청년의 이야기가 현실인 이유
일반적으로 재난 영화의 주인공은 특수 훈련을 받은 전문가이거나, 적어도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 영화는 그 공식을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용남은 대학 시절 클라이밍(암벽등반) 동아리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지만, 졸업 후에는 취업에 수차례 실패한 채 어머니의 칠순잔치에서 친척들의 시선을 피해 다니는 신세입니다.
저도 한동안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던 시기에 가족 모임이 유독 무겁게 느껴진 적이 있었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 "취업은 됐냐" 같은 질문이 반복될 때마다 괜히 위축되던 그 감각이, 용남이 후배 의주 앞에서 잘 나가는 척 거짓말을 하는 장면에서 그대로 겹쳐 보였습니다.
2023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 청년층(15
29세) 실업률은 공식 수치 기준으로도 5
6%대를 유지하고 있으며, 실제 체감 실업률은 이보다 훨씬 높습니다(출처: 통계청). 영화 속 용남의 상황이 단순한 설정이 아니라 실제 청년 세대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공감 코드가 왜 그렇게 강력하게 작동했는지 이해됩니다.
이 영화가 특히 인상적이었던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주인공의 약점(취업 실패, 사회적 무력감)이 나중에 강점으로 전환되는 서사 구조
- 재난 상황에서도 코미디 요소를 과하지 않게 유지하는 연출 균형
- 짝사랑, 가족, 생존이라는 보편적 소재를 재난 장르에 자연스럽게 녹여낸 방식
재난 대피 장면, 실제로는 얼마나 현실적인가
소방관으로 근무하다 보면 재난 관련 영화를 볼 때 일반 관객과는 조금 다른 시선이 생깁니다. 영화 속 가스 누출 장면에서 저는 자연스럽게 독성 가스 확산 패턴이나 건물 내 대피 동선을 떠올렸습니다. 화학사고 대응 매뉴얼에서 말하는 상부 피난(높은 곳으로 이동)이 실제 재난 대응에서 유효한 전술인지를 화면을 보면서 검토하게 되더군요.
여기서 상부 피난이란 유독가스 대부분이 공기보다 무겁기 때문에 낮은 층이나 지상에 먼저 축적되는 특성을 이용해 최대한 높은 위치로 이동하는 대피 방식을 의미합니다. 영화에서 용남 일행이 옥상을 향해 계속 올라가는 장면은 이 원칙과 어느 정도 일치합니다.
물론 세부 장면들은 영화적 과장이 분명합니다. 방독면(유독가스를 차단하는 호흡 보호 장비)의 사용 가능 시간이나 체력 소모 수준은 현실과 다소 차이가 있었고,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동하는 액션 시퀀스는 실제 구조 현장에서는 불가능한 설정들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이 정도 허용은 대중 오락 영화로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국민안전처(현 행정안전부)의 화학사고 대피 지침에서도 가스 사고 발생 시 바람 방향을 피해 높은 곳으로 이동하고, 젖은 수건 등으로 호흡기를 임시 보호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출처: 행정안전부). 영화에서 묘사된 공포와 혼란은 실제 재난 상황의 심리적 반응과 상당히 가깝게 표현됐다고 느꼈습니다.
쓸모없어 보이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
일반적으로 취업과 무관한 활동은 스펙이 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저도 살아오면서 "이걸 어디에 쓰나" 싶었던 경험들이 나중에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도움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소방 현장에서는 체력이나 공간 파악 능력, 침착한 판단력처럼 직접적인 자격증과 무관한 역량이 실제로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용남이 클라이밍으로 익힌 루트 파인딩(등반 경로를 사전에 분석하고 최적의 동선을 선택하는 기술) 능력이 건물 외벽 이동과 구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장면은 단순한 영화적 장치가 아닙니다. 루트 파인딩이란 단순히 몸으로 오르는 기술이 아니라, 전체 구조를 보고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선택하는 판단력을 말합니다. 그 판단력이 재난 상황에서 사람을 살리는 능력으로 전환되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라고 봅니다.
솔직히 이 부분에서 꽤 통쾌했습니다. 실패한 청년처럼 보이던 사람이 결국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하는 사람이 됩니다. 능력이 없어서 취업에 실패한 게 아니라,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이라는 이야기. 지금도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설정이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
엑시트는 재난 스펙터클보다 사람 이야기에 집중한 영화입니다. 화려한 CGI나 대규모 피해 장면보다, 옥상과 옥상 사이를 이어주는 밧줄 하나를 붙들고 버티는 두 사람의 모습이 훨씬 더 강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지금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는 노력도 언젠가는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메시지가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전달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오래 기억될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보지 않은 분이 있다면, 부담 없이 시작해서 후반부에 진심으로 응원하게 되는 경험을 해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