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근무하던 시절 한 학생이 떠오릅니다. 말수가 없고 친구도 없던 아이였는데, 체육대회 날만 되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영화 열여덟 청춘 속 순정이라는 캐릭터를 보는 순간, 그 아이가 겹쳐 보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문제 학생은 반항적이거나 공격적인 아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제 경험상 가장 눈에 안 띄는 아이가 오히려 가장 무거운 걸 혼자 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존재감 제로 뒤에 숨은 가정환경의 무게
순정은 학교에서 존재감이 거의 없는 학생입니다. 야자(야간 자율학습)를 빠지고 교실 한쪽에서 잠만 자다가, 체육 시간만 되면 살아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학교생활에 무관심한 아이처럼 보이지만, 집안 사정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엄마는 술과 남자에 의존하며 딸에게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각종 고지서와 독촉장이 쌓인 우편함이 이 가정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이런 환경을 교육심리학에서는 정서적 방임(emotional neglect)이라고 부릅니다. 정서적 방임이란 부모가 신체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자녀의 감정적 필요를 지속적으로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신체적 학대보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아이의 자아 형성과 대인관계 능력에 장기적으로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실제로 정서적 방임을 경험한 청소년은 또래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고 사회적 위축 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아동권리보장원).
제가 만났던 그 아이도 비슷했습니다. 가정환경이 어렵다는 건 담임 선생님도 알고 있었지만, 딱히 손쓸 방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아이가 운동장에서만 활기를 찾는 이유를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운동이 유일하게 자신이 통제할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순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에서도, 교실에서도 자신의 자리가 없는 아이가 운동장에서만큼은 누구보다 뚜렷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교무실 창문을 깬 이유, 문제행동을 읽는 시선
일반적으로 학교 유리창을 깨는 행동은 반항이나 비행으로 분류됩니다. 이 영화에서도 학생부 선생님은 즉각 징계위원회 회부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희주 선생님만 "왜 그랬는지 먼저 알아봐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핵심을 찌르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순정이 창문을 깬 건 엄마와의 격렬한 충돌 이후였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감정이 쌓여 폭발하는 방식, 이를 심리학에서는 행동화(acting out)라고 합니다. 행동화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 내면의 감정, 특히 분노나 절망을 충동적인 행동으로 표출하는 심리 기제를 말합니다. 어른들에게는 문제 행동으로만 보이지만, 사실은 내면의 고통이 외부로 터져 나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 부분이 교육 현장에서 가장 자주 놓치는 지점입니다. 결과만 보고 판단하는 것, 즉 유리를 깼으니 나쁜 학생이라는 식의 접근은 근본적인 해결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2023년 교육부 학교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학교 내 문제 행동을 경험한 학생의 상당수가 가정 내 갈등을 동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교육부). 처벌보다 원인 파악이 먼저여야 한다는 논거가 실제 데이터에서도 확인됩니다.
영화에서 순정의 문제행동을 바라보는 태도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학생부 선생님: 창문 파손 = 규율 위반 → 즉각 징계
- 희주 선생님: 창문 파손 = 심리적 신호 → 원인 파악 먼저
- 영화의 결론: 행동 뒤의 맥락을 읽어야 진짜 교육이 가능하다
저도 처음엔 규칙을 어기는 학생에게 선입견을 가졌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을 조금 더 오래 지켜보고 나서야, 규칙을 어기는 게 아니라 살아남으려고 버티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카드 테스트가 던진 질문, 자기존중감을 가르친다는 것
희주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진행하는 카드 테스트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가족, 친구, 멘토, 그리고 나 자신을 카드에 적고 하나씩 버려가는 방식인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마지막까지 부모나 친구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희주는 자신을 마지막에 남겼다고 말합니다. "내 인생은 내가 산다"는 말과 함께.
이 테스트는 자기존중감(self-esteem)을 시각적으로 체감하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자기 존중감이란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근본적인 믿음으로, 외부의 인정 없이도 자신을 중심에 두는 심리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학교에서는 타인을 존중하고 공동체를 중시하라는 교육을 많이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먼저 챙기는 법은 잘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장면이 저한테 강하게 남은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한 가지는 아쉬웠습니다. 순정처럼 가정 안에서 이미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당연해진 아이에게, "자신을 가장 소중히 여겨라"는 메시지는 들리는 것과 실천하는 것 사이의 간격이 너무 클 수 있습니다. 그 격차를 줄이려면 개인의 깨달음만으로는 부족하고, 실질적인 청소년 복지 지원 체계나 주변 어른들의 지속적인 개입이 함께 작동해야 합니다. 영화가 그 부분까지 다뤘다면 더 완결된 이야기가 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희주 선생님처럼 겉으로는 무심해 보이지만 학생의 마음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어른을, 저도 실제로 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선생님이 왜 그러는지 이해를 못 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선생님 밑에서 아이들이 가장 많이 달라졌습니다. 훈계보다 이해가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영화 열여덟 청춘은 단순한 성장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아이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문제 행동 뒤의 맥락을 읽으려는 노력, 자기 자신을 돌볼 줄 아는 어른의 모습, 그리고 한 사람의 진심이 아이를 움직이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가정에서 상처받은 아이를 가까이서 본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이 영화가 꽤 깊이 닿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월 25일 극장 개봉작이니, 부모와 자녀가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눠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