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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가까운 사람에 대해 정작 아무것도 모른다는 느낌, 한 번쯤 받아보신 적 있으신가요? 저는 부모님과 같은 집에서 수십 년을 살았지만, 정작 어머니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어머니한테 직접 들은 건 손에 꼽습니다. 영화 윤희에게는 그 낯익은 어색함에서 시작됩니다. 편지 한 장이 20년의 침묵을 깨는 이야기, 생각보다 훨씬 깊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윤희에게 사진
    윤희에게 사진

    편지 한 장이 열어놓은 것들

    어느 날 세봄의 집으로 편지 한 통이 날아듭니다. 발신인은 일본 오타루에 사는 준. 수신인은 세봄의 엄마 윤희입니다. "잘 지내니? 오랫동안 이렇게 묻고 싶었어." 딱 이 한 줄로 세봄은 엄마의 과거에 궁금증을 갖게 되고, 저도 그 순간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이 영화는 내러티브 갭(Narrative Gap)이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내러티브 갭이란 인물의 과거나 감정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빈 공간을 남겨 관객이 스스로 채워 넣도록 유도하는 서술 기법입니다. 덕분에 관객은 수동적으로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인물의 마음을 읽어가게 됩니다.

    사실 저는 처음에 이 방식이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왜 이렇게 설명을 안 해주지 싶었거든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실제 인간관계도 똑같습니다. 어머니가 왜 그때 그런 말을 했는지, 왜 그 표정을 지었는지를 저는 한참 뒤에야 다른 가족한테서 들어서 알게 된 적이 있습니다. 영화가 그 감각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던 겁니다.

    말하지 못한 마음이 만든 거리

    윤희와 세봄은 서로를 분명히 사랑합니다. 그런데 대화가 너무 없습니다. 세봄이 "엄마 뭐 때문에 살아?"라고 물었을 때 윤희가 "자식 때문에 살지"라고 답하는 장면, 저는 그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윤희는 몰랐을 것 같았습니다. 세봄은 자신이 짐이라고 느꼈으니까요.

    이런 모녀 사이의 소통 단절은 단순히 캐릭터 설정이 아닙니다. 정신건강의학 분야에서는 이를 감정 표현 불능증(Alexithymia)과 연관 지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감정 표현 불능증이란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이 저하된 상태를 말하는데, 가족 간 유대 관계에서도 이런 패턴이 대물림되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랑하는데도 표현하지 못하는 것, 그건 성격이 차가운 게 아니라 방법을 배우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세봄이 외삼촌에게, 친부에게, 주변을 돌고 돌아 엄마에 대해 알아가는 모습이 제 경험과 너무 겹쳐 보였습니다. 저 역시 어머니의 이야기를 어머니한테 직접 묻기보다 이모나 외삼촌을 통해 먼저 알게 된 적이 많았으니까요. 그게 왜인지 영화를 보면서 처음으로 생각해 본 것 같습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감정의 층위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말하고 싶지만 어떻게 꺼낼지 모르는 마음 (세봄 → 윤희)
    • 전하고 싶었지만 끝내 보내지 못했던 편지들 (준 → 윤희)
    • 표현하면 짐이 될 것 같아 참아온 속마음 (윤희 → 세봄, 준 모두)

    이 세 가지가 동시에 흐르는 영화입니다. 그래서 어느 지점에서든 한 번쯤은 본인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옵니다.

    일본 여행이 바꿔놓은 것

    세봄은 일본행을 제안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여행이지만, 실제로는 준을 찾아 엄마의 과거를 들여다보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낯선 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조금씩 균열이, 아니 균열이 아니라 틈이 생깁니다. 서로를 새로 보게 되는 틈이요.

    제가 직접 경험해봤는데, 여행지에서는 이상하게 평소에 하지 못하던 말이 나옵니다. 집에서는 어색했던 이야기가 낯선 골목이나 온천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봄과 윤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엄마 담배 펴?"라는 말 한마디로 갑자기 공범이 되는 장면, 그 장면이 왜 그렇게 따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공통점을 발견하는 일이 거리를 좁히는 것 같습니다.

    여행지로 등장하는 오타루는 영화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런 요소를 영화 용어로는 로케이션 내러티브(Location Narrative)라고 합니다. 로케이션 내러티브란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공간 자체가 인물의 감정 상태나 주제를 시각적으로 대변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눈이 쌓인 오타루의 골목과 운하는 윤희가 오랫동안 덮어두었던 감정과 그것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관광지로서의 오타루는 홋카이도 내에서도 보존된 역사 거리와 운하로 유명한 도시입니다. 겨울철 방문객 수가 꾸준히 높은 편인데, 영화 덕분에 한국 관광객에게도 알려지게 된 측면이 있습니다(출처: 오타루시 관광진흥과).

    퀴어 서사를 다루는 방식에 대하여

    윤희에게는 퀴어 영화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퀴어 영화(Queer Cinema)란 성소수자의 정체성과 그들이 겪는 사회적 경험을 중심 서사로 다루는 영화 장르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정체성을 사건이나 갈등의 핵심으로 소비하지 않습니다. 윤희와 준의 관계는 자극적으로 묘사되지 않고, 그냥 오래전에 사랑했던 두 사람의 이야기로 다뤄집니다.

    이 점이 저는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를 다루는 방식이 여전히 '특별한 사안'처럼 다루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그냥 한 사람이 살면서 간직해온 그리움의 이야기로 접근합니다. 그래서 어떤 관객이든 윤희의 마음에 공감하게 됩니다. 다름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감정으로 풀어냈기 때문입니다.

    국내 퀴어 콘텐츠 관련 인식 조사에 따르면, 성소수자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를 관람한 이후 해당 집단에 대한 공감 수준이 유의미하게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윤희에게가 조용히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솔직히 말하면, 전개 속도가 느린 편이라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구간이 있었습니다. 인물의 과거를 직접 설명하지 않는 방식이 영화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맥락을 스스로 잡아야 하는 부분이 많아서 처음 보는 분들에게는 입장하기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은 영화의 한계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윤희에게를 다 보고 나서 저는 오랜만에 어머니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별 이유 없이요. 영화가 그 마음을 끌어냈습니다. 빠른 전개나 강한 자극이 없어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이 영화가 증명합니다. 눈 내리는 겨울밤에, 가까운 사람과 함께 보거나 혼자 조용히 보기 좋은 작품입니다. 보고 나서 오래된 연락처 하나를 꺼내보고 싶어 진다면, 그게 이 영화의 가장 정직한 효과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mgoLieuyPY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