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우주 SF"라고 하면 거창한 영웅 서사만 떠올렸습니다. 근데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달랐습니다. 두려워서 도망치려 했던 평범한 과학 선생님이 끝내 스스로의 선택으로 누군가를 구하러 간다는 이야기. 보는 내내 제가 겪었던 어떤 순간이 자꾸 겹쳐 보였습니다.

외계생명체 로키가 이토록 설득력 있는 이유
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 가장 먼저 화제가 된 건 단연 외계 생명체 로키의 구현이었습니다. 원작 소설에서 로키는 갑각류처럼 단단한 몸과 거미를 닮은 형태로 묘사되는데, 팬들이 저마다 상상하던 모습보다 영화 속 로키는 훨씬 더 생동감 있고 감정이 느껴지는 존재로 그려졌습니다.
흥미로운 건 로키의 설정이 순수한 상상이 아니라 과학적 추론(scientific reasoning)에서 출발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과학적 추론이란, 실제 천문학 데이터와 물리 법칙을 바탕으로 외계 환경을 역산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원작 작가 앤디 위어는 40에리단(40 Eridani)이라는 실제 항성계를 참고해 로키의 고향 행성 에리드를 설계했습니다. 당시 과학계에서 40에리단 A별 근처에 외계 행성이 존재할 가능성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그 행성은 별과 너무 가까워 일반적인 환경이라면 액체 상태의 물이 존재할 수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작가는 이 문제를 대기압 설정으로 해결했습니다. 에리드 행성은 대기압이 극도로 높고 물의 끓는점이 210도에 달한다고 가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에 그레이스 박사가 로키에게 "바다가 너무 뜨겁다"고 불평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는 그 대사 하나에서 작가가 얼마나 치밀하게 세계관을 설계했는지 느꼈습니다.
로키에게 시각 기관이 없다는 설정도 같은 맥락입니다. 대기가 두꺼워 햇빛이 지표면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환경이라면, 시각을 발달시킬 필요가 없다는 논리입니다. 이처럼 로키의 생물학적 특성 하나하나가 행성 환경에서 거꾸로 도출된 셈입니다.
그런데 저를 더 사로잡은 건 로키의 감정선이었습니다. 로키는 자신의 짝 에이드리언을 지독하게 그리워하고, 질투하고, 그레이스와 깊은 우정을 쌓습니다. SF 장르에서 외계 생명체(extraterrestrial organism)란 대개 인간을 위협하는 본능적 존재로 그려지는데, 여기서 extraterrestrial organism이란 지구 외 환경에서 진화한 생명 형태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로키는 그 공식을 완전히 깨는 존재였습니다.
실제로 우주 비행사들이 직면하는 가장 큰 적이 고립과 외로움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제미니·아폴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우주 비행사 30쌍 중 무려 23쌍이 이혼했다는 사실은 우주 임무가 얼마나 인간 관계를 갉아먹는지 보여줍니다(출처: NASA History Division). 로키가 에이드리언을 그리워하는 감정은 그래서 허구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부분처럼 읽혔습니다.
스트라트의 선택,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가
솔직히 이 부분에서 저는 영화가 조금 더 파고들었으면 했습니다. 스트라트(Eva Stratt)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 그레이스의 기억 자체를 약물로 삭제하고 강제로 우주선에 태웁니다. 원작에서는 이 사실이 훨씬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는데, 영화에서는 다소 완화된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스트라트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그레이스가 깨어난 뒤 자신에 대한 분노 때문에 임무를 거부할 수 있으니, 아예 기억을 지워 그 분노 자체를 없애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일단 깊이 관여하면 결국 끝까지 해낼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고 하죠. 제가 직접 겪어봤는데, 이런 식의 "네가 최적임자니까 억지로라도 맡겨야 해"라는 논리는 현실에서도 꽤 자주 만납니다. 처음에는 분명히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방식입니다.
그렇지만 스트라트를 단순한 악역으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녀는 우주 비행사들이 고립된 공간에서 극단적인 심리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 혼수 상태(cryogenic suspension) 방안을 도입했습니다. 여기서 cryogenic suspension이란 신체 기능을 극도로 낮춰 장기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가사 상태 기술을 의미합니다. 안타깝게도 야오 사령관과 일류키나는 이 과정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스트라트의 오판이 두 사람의 죽음으로 이어졌습니다.
목적이 선하다고 해서 수단까지 정당화되는가. 저는 이 질문을 쉽게 정리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아이러니한 건 혼수 상태를 권장한 사람이 다름 아닌 그레이스 본인이었다는 점입니다. 결국 자신이 조언한 방식에 의해 자신이 기억을 잃었다는 설정은 묘하게 씁쓸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스트라트가 파티에서 해리 스타일스의 Sign of the Times를 부르는 장면은 그래서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대기권을 뚫고 나아가면 모든 게 괜찮아 보일 거야"라는 가사가 지구를 떠나야 하는 우주 비행사들의 운명과 겹쳐지는데, 스트라트 역을 맡은 배우 산드라 휠러가 촬영 전 단 하루 만에 고른 곡이라고 합니다. 급하게 찾은 곡이 이렇게 맥락과 맞아떨어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용기란 처음부터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한 부분은 그레이스의 변화였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도망치려 했고, 자이로 우주선에 자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지구로 돌아갈 유일한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로키를 구하러 방향을 돌립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처음부터 사명감이 넘쳐서 책임을 지는 사람보다, 상황에 밀려 시작했지만 관계가 생기고 나서야 진짜 책임감이 생기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처음엔 "왜 내가 해야 하지"라는 마음이 컸는데,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나서야 "내가 끝까지 해야겠다"는 마음이 따라왔습니다.
실제로 NASA 심리 연구팀에 따르면 우주 비행사들은 용기를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의도적으로 훈련한다고 합니다. 일부러 오타를 낸 이메일을 보내거나 새로운 취미를 시작하는 것처럼, 작은 두려움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방식으로 용기를 키워나간다는 것입니다(출처: NASA Human Research Program). 여기서 용기 훈련이란 불확실한 상황에 대한 내성을 높이는 심리적 컨디셔닝(psychological conditioning) 과정을 말합니다. 즉, 용기는 성격이 아니라 습관이라는 뜻입니다.
소련 우주 비행사 블라디미르 코마로프의 이야기도 그레이스의 선택과 겹쳐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탑승할 소유즈 1호에 200개가 넘는 구조적 결함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올랐습니다. 자신이 거부하면 친구 유리 가가린이 그 자리에 타야 한다는 이유 하나로. 결국 낙하산 고장으로 추락해 사망한 그의 이야기는,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을 안고도 움직이는 선택임을 보여줍니다.
그레이스가 로키에게 지구 인형을 선물하는 장면도 같은 맥락에서 읽힙니다. 우주 비행사들이 무중력 확인용으로 가장 소중한 사람의 인형을 챙기는 전통은 유리 가가린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레이스에게 가장 소중한 기억은 학생들이었고, 그 인형을 로키에게 줬다는 건 이제 그에게 로키가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됐다는 의미였습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가 단순한 SF 영화로 끝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대한 우주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결국 핵심은 "사람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용기를 낸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원작 소설과 함께 영화를 보면 이 감정선이 훨씬 더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아직 책을 읽지 않으셨다면, 영화를 보고 나서 꼭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