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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대북공작원이 10년간 신분을 숨기고 북한 권력층에 침투했다는 사실,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첩보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1990년대 한반도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는 점이 더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개인 한 명이 국가를 위해 감수해야 했던 것들을 들여다보면, 단순한 영웅담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알게 됩니다.

    공작 포스터
    공작 포스터

    신분세탁, 머리가 아니라 감정을 눌러야 가능한 일

    일반적으로 첩보 공작원이라 하면 뛰어난 두뇌와 기술로 무장한 인물을 떠올립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흑금성의 실제 과정을 들여다보니,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감정 통제였습니다.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 현 국가정보원의 전신)로부터 대북 공작원 제안을 받은 박성영은 1992년부터 완전히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여기서 신분세탁이란 단순히 이름을 바꾸는 게 아니라, 국내에 침투한 보정 간첩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고,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빚을 쌓고, 군에서 추방된 낙오자처럼 보여야 하는 전 과정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그는 예전 지인들에게 사업 자금을 핑계로 돈을 빌렸고, 어느덧 신용 불량자가 되었습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조직 안에서 제 역할과 실제 속마음이 달랐던 순간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지시받은 일을 처리해야 했던 그 감각, 말과 표정을 상황에 맞게 조절하고 나면 하루 종일 진이 빠지던 느낌이 공명했습니다. 그런데 흑금성은 그 긴장을 몇 달이 아니라 10년 가까이 유지해야 했습니다.

    자백제(Truth serum, 피험자의 의식을 흐리게 하여 자백을 유도하는 약물)를 몰래 투여당하는 장면은 특히 서늘했습니다. 여기서 자백제란 피험자의 의식 저항력을 낮춰 무의식적으로 진실을 말하게 만드는 약리적 심문 기법으로, 실제 냉전 시대 정보기관들이 광범위하게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몽사몽한 상태에서도 정체를 감추는 데 성공했다는 건, 수년간 쌓인 훈련과 감정 억제가 그만큼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는 뜻이겠지요.

    대북공작의 실체, 이념보다 이해관계가 먼저였다

    이 이야기에서 제가 가장 불편하게 느꼈던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일반적으로 남북 관계는 이념의 대립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 흑금성의 공작 과정을 보면, 양측 모두 이념보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북한 대외경제위원회 리명훈과 박성영이 처음 접선하는 장면은 인상적입니다. 리명훈은 그를 몇 가지 질문으로 검증합니다. 군 정보기관 출신인지, 신용불량자였던 게 맞는지, 그리고 남조선 정보를 넘길 수 있는지. 이른바 HUMINT(인간정보, Human Intelligence)적 신원 확인 과정입니다. HUMINT란 기술 장비가 아닌 사람 간의 직접 접촉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방식으로, 냉전 이후에도 첩보 활동의 핵심 수단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장면들이 픽션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실제로 사람 간의 신뢰라는 게 조건을 따지기 전에 감정이 먼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리명훈이 박성영을 "호연직기(豪然直氣)"라 칭하며 신뢰를 표현했을 때, 그건 단순히 공작상의 언어가 아니라 진짜 인간적인 인정이었습니다. 적대적 체제 안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결국 감정이 생긴다는 점이 묘하게 씁쓸했습니다.

    흑금성이 수행한 핵심 임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북한 핵개발 관련 핵물리학자 김장혁 교수를 한국으로 유인하여 핵 보유 사실 확인
    • 북한 대외경제위원회 핵심 인물 리명훈과의 신뢰 구축 및 내부 정보 수집
    • 광고 사업을 위장 명목으로 영변 지역 접근 시도
    • 대선을 앞두고 북한 강경파의 대남 무력 도발을 막기 위한 설득 작전

    이 모든 과정이 단 한 명의 공작원 위에 얹혀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안기부가 이 시기 대북 공작에 얼마나 많은 인력을 투입했는지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수치가 없습니다만, 2년 사이에 수많은 공작원이 사라졌다는 언급이 당시 공작의 위험성을 짐작하게 합니다(출처: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규명 위원회).

    배신, 가장 위험한 건 적이 아니라 조직이었다

    공작원 이야기에서 으레 클라이맥스는 적의 공격이나 탈출 장면으로 채워집니다. 그런데 흑금성에서 가장 아프게 다가온 장면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마자, 안기부 내부에서 흑금성의 정체를 언론에 폭로하고 꼬리 자르기를 시전한 장면입니다.

    공작 보안(Operational Security, OPSEC)이란 아군의 정보가 적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모든 활동을 관리하는 원칙입니다. 여기서 OPSEC이란 공작원 신분과 활동 정보가 외부에 절대 유출되지 않아야 한다는 첩보 활동의 기본 철칙입니다. 그런데 이 원칙을 깨뜨린 건 북한이 아니라, 흑금성이 10년을 믿고 일했던 조직 자체였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배신의 주체가 당연히 북한 측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실제로는 정권이 교체되어 조직 내 기득권이 흔들리자, 공작원 한 명의 안전보다 정치적 생존이 우선이 되어버린 겁니다. 국가 기밀 공작 활동에서 공작원 보호가 얼마나 취약하게 작동할 수 있는지, 이 사례는 냉정하게 보여줍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가 공작 활동 중 신분이 노출된 공작원에 대한 법적 보호 체계는 여전히 미비한 상태입니다(출처: 국가인권위원회). 흑금성의 사례는 그 공백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실제 사례로 보여준 셈입니다.

    제 경험상 조직 안에서 "이게 정말 맞나?" 싶은 순간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그럴 때 대부분은 그냥 넘어가게 됩니다. 맡은 역할이 있고, 지시받은 일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흑금성의 이야기는 그 "그냥 넘어감"이 쌓이고 쌓여 결국 한 사람 전체를 소모품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걸 정면으로 보여줍니다. 이 부분이 단순한 첩보 서사와 이 이야기를 구분 짓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 이야기에서 오래 남는 건 북핵 정보나 대선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서로 다른 체제에 속해 있으면서도 진짜 신뢰를 쌓아간 두 사람의 관계, 그리고 그 신뢰보다 더 빨리 조직이 사람을 버리는 장면이었습니다. 흑금성이라는 코드네임 뒤에 있는 사람이 실제로 어떤 감정을 안고 10년을 버텼는지, 이 이야기를 접한 분이라면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볼 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OmPMS8srZg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