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왕이 더 나쁜 왕이었다면, 우리는 그 가짜를 왕으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다시 봤을 때 저는 이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처음 극장에서 볼 땐 그저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이 벌이는 궁중 코미디"로만 봤는데, 시간이 흘러 다시 보니 웃음보다 훨씬 무거운 무언가가 남아 있었습니다. 권력의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그 자리의 무게를 결정한다는 것을요.광해군과 하선, 같은 얼굴 다른 시선 — 시대적 맥락영화의 배경은 조선 중기, 광해군 재위 시절입니다. 역사적으로 광해군은 당쟁과 외교적 위기 속에서 복잡한 선택을 반복했던 군주입니다. 영화 속 광해군은 신하들의 독살 시도를 의심하며 은수저로 독을 확인하는 장면부터 등장합니다. 은수저의 색이 변하..
누아르 영화라고 하면 어둡고 잔인한 액션이 전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많지 않으신가요?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달콤한 인생을 다시 들여다보니, 이 영화의 핵심은 총격전이 아니라 한 남자가 자기감정을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분위기에 먼저 압도됐고, 나중엔 허무함에 오래 눌렸습니다.연출 의도: 멋있게 보이려 했던 게 오히려 패착이었다일반적으로 누아르 영화는 강렬한 첫 장면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달콤한 인생은 반대로 갔습니다. 선우가 쫓기는 액션 신으로 시작하려다 "너무 전형적이다"는 이유로 삭제했고, 대신 불교 선종의 선문답인 풍번 문답(風幡問答)으로 영화를 열었습니다. 풍번 문답이란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닌 마음이다"라는 혜능의 가르침으로, 외부 세계가 아..
비행기를 타다 보면 한 번쯤은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 뭔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저도 출장길에 갑작스러운 난기류를 만난 적이 있는데, 불과 몇 분 만에 손에 땀이 흠뻑 났습니다. 영화 비상선언은 바로 그 공포를 2시간 넘게 스크린 위에 올려놓은 작품입니다. 재난 블록버스터로서의 완성도와 한계를 동시에 가진 이 영화, 어떻게 봐야 할지 정리해 봤습니다.비행기라는 밀실, 재난영화의 배경이 되다재난영화 장르에서 공간 설정은 긴장감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입니다. 자동차나 기차는 멈출 수라도 있지만, 비행기는 그게 안 됩니다. 1만 피트 상공에서 문제가 생기면 승객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비상선언은 바로 이 밀폐된 공간이 주는 공포를 출발점으로 삼습니다.영화는 공항에서 한..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단순한 폭발 장면 위주의 재난 오락영화겠거니 하고 앉았는데, 중간부터는 휴대폰을 내려놓게 되더군요. 영화 백두산은 화산 지수(VEI) 8등급이라는 극단적 재난 설정을 한국적 감정선과 결합한 작품입니다. 재난 스펙터클과 인물의 선택 사이에서 이 영화가 어디쯤 서 있는지, 직접 보고 나서 정리해 봤습니다.백두산 폭발, 완전히 허구로 볼 수 없는 이유일반적으로 백두산 화산 폭발은 먼 미래의 이야기, 혹은 학자들끼리 하는 논쟁 정도로 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기 전에 관련 다큐멘터리를 몇 편 접하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백두산은 실제로 지질학적으로 활화산(Active Volcano)으로 분류됩니다. 활화산이란 현재도 마그마 ..
복수를 끝낸 사람이 행복해졌다는 이야기를 저는 잘 믿지 않습니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를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잔인한 스릴러라고 생각했는데, 몇 년이 지나 다시 보고 나서 완전히 다른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단순히 범인을 응징하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복수가 사람을 어디까지 바꿔 놓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국정원 요원과 연쇄살인마가 만들어낸 이야기의 구조영화는 단순해 보이는 설정에서 시작합니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 주연이 눈 내리는 밤 연쇄살인마 장경철에게 납치되어 살해됩니다. 국정원 요원인 약혼자 수현은 범인을 찾아 복수를 결심하고, 그때부터 둘의 기묘한 추격전이 시작됩니다.제가 이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건 서사 구조 자체였습니다. 일반적인 복수 스릴러가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향하는 단선적 플롯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