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무하던 시절 한 학생이 떠오릅니다. 말수가 없고 친구도 없던 아이였는데, 체육대회 날만 되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영화 열여덟 청춘 속 순정이라는 캐릭터를 보는 순간, 그 아이가 겹쳐 보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문제 학생은 반항적이거나 공격적인 아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제 경험상 가장 눈에 안 띄는 아이가 오히려 가장 무거운 걸 혼자 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존재감 제로 뒤에 숨은 가정환경의 무게순정은 학교에서 존재감이 거의 없는 학생입니다. 야자(야간 자율학습)를 빠지고 교실 한쪽에서 잠만 자다가, 체육 시간만 되면 살아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학교생활에 무관심한 아이처럼 보이지만, 집안 사정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엄마는 술과 남자에 의존하며 딸에게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각종 고지서..
경찰이 범인을 잡았다고 하면 그게 끝이라고 생각하셨나요?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영화 끝장 수사를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자백이 있어도, 증거가 있어도, 심지어 모두가 확신해도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 그 불편한 질문을 2시간 내내 들이미는 영화입니다.오판, 억울한 사람이 생기는 구조이 영화의 배경이 된 실화 사건들은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오판(誤判) 사례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습니다. 오판이란 수사기관이나 법원이 잘못된 판단으로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확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시스템 전체의 문제가 쌓인 결과입니다.특히 영화에서 다루는 허위자백 문제는 현실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허위자백이란 실제로 범행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수사 과정에서 거짓으로 범행..
좀비가 학습을 한다면, 인간은 과연 이길 수 있을까요? 부산행을 처음 본 뒤 친구들과 한참 이야기를 나눴던 주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좀비 장르를 즐겨 봐 왔는데, 솔직히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웬만한 작품을 틀어도 "또 이 패턴이네" 싶은 느낌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군체는 꽤 오랜만에 진지하게 앉아서 분석하고 싶어진 작품이었습니다.집단지성, 좀비 장르를 다시 쓰다군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설정은 감염자들이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을 형성한다는 점입니다. 집단지성이란 다수의 개체가 정보를 공유하며 단일 개체보다 높은 수준의 판단력을 발휘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개미 군집이 먹이를 찾거나 벌집이 최적의 구조를 설계하는 방식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군체는..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우주 SF"라고 하면 거창한 영웅 서사만 떠올렸습니다. 근데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달랐습니다. 두려워서 도망치려 했던 평범한 과학 선생님이 끝내 스스로의 선택으로 누군가를 구하러 간다는 이야기. 보는 내내 제가 겪었던 어떤 순간이 자꾸 겹쳐 보였습니다.외계생명체 로키가 이토록 설득력 있는 이유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 가장 먼저 화제가 된 건 단연 외계 생명체 로키의 구현이었습니다. 원작 소설에서 로키는 갑각류처럼 단단한 몸과 거미를 닮은 형태로 묘사되는데, 팬들이 저마다 상상하던 모습보다 영화 속 로키는 훨씬 더 생동감 있고 감정이 느껴지는 존재로 그려졌습니다.흥미로운 건 로키의 설정이 순수한 상상이 아니라 과학적 추론(scientific reasoning)에서 출발했다는..
사회 초년생 시절,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기쁘기보다 무서웠습니다.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현실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영화 만약에는 바로 그 감각을 정확하게 짚어냅니다. 가난과 사랑이 충돌할 때 사람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그리고 그 무너짐 이후에 무엇이 남는지를 담은 작품입니다.집이란 무엇인가, 정원이 찾아 헤맨 것의 정체솔직히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집을 주제로 한 멜로라는 설명이 조금 추상적으로 들렸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오히려 이 영화만큼 집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작품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정원이 원한 것은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찾던 것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안전 기지(Secure Base) 개념에 가깝습니다. 안전 기지란 영국 발달심리학자 존 볼..
첩보 영화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저 사람, 과연 아군일까 적군일까." 영화 휴민트 예고편을 처음 접했을 때도 같은 감각이 왔습니다. 저도 소방 현장에서 여러 기관과 협업하다 보면 상대를 믿어야 하면서도 사실관계를 끝까지 확인해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의 긴장감이 단순한 오락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심리전이 만들어내는 긴장감휴민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총격보다 심리전(psychological warfare)입니다. 여기서 심리전이란 상대의 판단력을 흐리거나 불신을 심어 행동을 유도하는 정보 전술을 말합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를 감시하면서 동시에 감시당하고 있고, 누가 먼저 상대의 패를 읽느냐가 생사를 가릅니다.저는 현장에서 얻는 정보 하나가 상황 전체를 뒤바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