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윤동주의 시를 줄줄 외우면서도 그게 얼마나 무거운 말인지 몰랐습니다. 영화 를 보고 나서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는 문장이 시험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필사적인 다짐이었다는 게 비로소 느껴졌습니다. 위대한 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열등감과 흔들림을 안고도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킨 청년의 이야기로 다시 읽혔습니다.창씨개명과 유학, 1943년의 선택이라는 벽영화를 보면서 제가 처음 멈칫했던 장면은 윤동주와 송몽규가 일본 유학을 위해 창씨개명을 해야 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창씨개명이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1940년부터 조선인에게 일본식 성명을 강제로 채택하게 한 동화 정책입니다. 쉽게 말해 자기 이름을 버려야만 배움의 기회가 주어지는 구조였습니다. 윤동주는 히라노 도주라는 이..
상을 많이 받은 영화가 반드시 가장 좋은 영화일까요? 솔직히 저도 미나리를 보기 전까지는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에 아카데미까지 거론되는 작품이니 기생충 같은 긴장감과 반전이 있을 거라고 당연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든 감정은 예상과는 꽤 달랐습니다. 이 영화는 거대한 사건 없이도 오래 남는 영화였고, 동시에 왜 이 작품이 이 시점에 이토록 주목받는지 곱씹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이민자 정서: 미국 영화인데 왜 이렇게 한국 냄새가 날까일반적으로 미나리를 한국계 미국인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소개하지만,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조금 달랐습니다. 배경은 분명 1980년대 아칸소 허허벌판이고, 대사도 대부분 한국어인데, 이 영화는 제가 알고 있는 미국 이민자 영화의 문법을 ..
스포츠 영화에서 주인공이 처음부터 잘하는 걸 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오히려 그런 영화를 보면 흥미가 뚝 떨어집니다. 2009년 개봉한 영화 〈국가대표〉는 800만 관객을 모은 스포츠 영화의 최다 흥행작인데, 정작 이 영화에 나오는 선수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된 것 하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이 영화의 전부였습니다.이 선수들은 왜 이렇게 사연이 많을까영화를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스키점프라는 종목보다 인물들의 사연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해외 입양인 차헌태, 약물 복용으로 자격 정지를 당한 흥철, 군 면제만 바라는 구, 지렁이 잡는 봉구까지.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 사람들이 실패자가 아니라 각자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특히 차헌태가 방송 스튜디오에서 어머니의 기억을 더듬는 ..
2014년 개봉한 영화 '수상한 그녀'는 개봉 당시 관객 80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웃기고 가벼운 코미디 정도로 생각했는데, 10년이 지나 다시 꺼내 보고 나서는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노인을 바라보는 제 자신의 시선이 얼마나 편향되어 있었는지, 영화 한 편이 그걸 정면으로 짚어줬기 때문입니다.편견 — 우리는 나이로 사람을 먼저 판단한다영화 속 주인공 오말순은 욕 잘하고 잔소리 심한 칠순 할머니로 등장합니다. 가족들 눈에는 그냥 '귀찮은 존재'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사진관에서 갑자기 20대 외모로 돌아온 뒤,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180도 바뀝니다. 달라진 건 겉모습뿐인데, 대우가 완전히 달라지는 겁니다.이걸 심리학 용어로 '연령주의(Ageism)'라고 합니다. 연령주의란 나이를 ..
영화 써니는 2011년 개봉 당시 누적 관객 736만 명을 돌파하며 그해 한국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작품입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웃기고 뭉클한 영화겠거니 했는데, 다 보고 나서 한동안 연락 못 한 친구 얼굴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그게 이 영화가 가진 힘이었습니다.써니가 꺼낸 추억, 사실 나 얘기였다영화는 현재 시점의 나미가 병원에서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고등학교 절친 춘화를 우연히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춘화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태였고, 죽기 전에 써니 멤버들을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마지막 부탁을 남깁니다. 이 짧은 도입부가 제 경우엔 생각보다 훨씬 세게 들어왔습니다.제가 직접 겪어보니, 오랜 친구와 멀어지는 건 싸워서가 아니라 그냥 서로 바빠지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더군요. 연..
지쳐서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영화 한 편이 말 한마디보다 더 깊이 닿을 때가 있습니다. 리틀 포레스트가 저한테 그랬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음식이 예쁘게 나오는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힘들었던 시기에 다시 보니 전혀 다른 영화였습니다. 이 글은 지쳐서 뭔가를 쉬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분들을 위해 썼습니다.힐링영화라고만 보면 절반만 보는 겁니다리틀 포레스트를 단순히 힐링영화로 분류하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 표현이 조금 아깝다고 느꼈습니다. 힐링이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가볍고 예쁜 무언가로 소비되기 쉬운데, 이 영화는 그보다 훨씬 구체적인 감정을 건드리거든요. 임용고시에 혼자만 떨어지고, 남자친구와 사이가 멀어지고, 새벽 두 시에 인스턴트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는 주인공 혜원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