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봤던 영화를 어쩌다 다시 틀었다가, 전혀 다른 영화처럼 느껴진 경험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게 였습니다. 처음 봤을 땐 그냥 웃겼습니다. 근데 몇 년이 지나 다시 봤더니, 같은 장면에서 웃음 대신 먹먹함이 먼저 올라왔습니다. 이 글은 그 경험에서 시작합니다.줄거리 - 코미디 포장 안에 감춰진 상실의 이야기2001년 개봉한 는 공익근무 중인 평범한 청년 견우가 지하철에서 술에 취한 그녀를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첫 만남부터 억울하게 유치장까지 끌려가고, 이후에도 그녀의 일방적인 호출에 응하고, 스쿼시·검도 대결에서 매번 얻어맞는 구도가 반복됩니다.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이 장면들이 그냥 코미디 소재라고만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영화는 중반부터 다른 층위를 드러냅니다. 그녀는 ..
문제아를 가르치면 사람이 바뀐다고 믿었던 적이 있습니다. 저도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말 안 듣는 학생을 가르쳐봤기 때문에 그 믿음이 얼마나 순진한 건지 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2003년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는 그 순진한 믿음을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보면서 황당하다가도, 왜인지 모르게 끝이 궁금했습니다.시대감성: 폴더폰과 싸움짱이 공존했던 그 시절로맨틱 코미디(Romantic Comedy)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여기서 로맨틱 코미디란 사랑을 소재로 하되 유쾌한 갈등과 해소를 반복하며 관객을 끌어당기는 서사 구조를 말합니다. 문제는 2000년대 초반 한국식 로맨틱 코미디는 지금과 꽤 달랐다는 점입니다. 학교 짱, 삥 뜯기, 주먹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장면이 낭만의 일부로 들어가 있었습니다.'동..
솔직히 저는 뷰티 인사이드를 처음 봤을 때 '매일 얼굴이 바뀌는 남자'라는 판타지 설정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다시 보니 제가 놓쳤던 게 많았습니다. 이 영화가 진짜 하려는 말은 설정 그 너머에 있었고, 그걸 뒤늦게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마지막 장면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판타지 설정이 실은 가장 현실적인 질문이었다일반적으로 판타지 장르는 현실과 거리를 두기 위한 장치로 쓰인다고들 알고 있는데, 제 경험상 이 영화는 정반대로 작동했습니다. 주인공 김우진은 자고 일어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의 외형을 가진 채 깨어납니다. 성별도, 나이도, 인종도 달라집니다. 영화 속에서 이 현상을 가리키는 말은 따로 없지만, 심리학 용어로 풀자면 일종의 신체적 정체성 분리(Body Identity Disr..
멀쩡하게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영화 는 이별 후 상처 없이 새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통념에 정면으로 반기를 듭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동안 웃으며 출근했던 한 지인의 얼굴이 자꾸 겹쳤습니다. 망가진 채로 만나도 연애가 될 수 있다는 것, 이 영화가 300만 관객을 모은 이유가 거기 있다고 생각합니다.왜 술에 취해야만 진심을 말할 수 있었을까 - 영화의 공감 포인트이 영화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장치는 술입니다. 두 주인공 재훈과 선영은 맨정신에는 좀처럼 속을 드러내지 않다가, 소주잔이 쌓일수록 조금씩 무너집니다. 처음에는 그 설정이 익숙하게 느껴졌는데, 생각해 보니 이건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romantic comedy)의 클리셰, 즉 장르적 관습을 반복하는 것과는 ..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가장 무서운 건 거절이 아니라 타이밍을 놓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너의 결혼식」을 보면서 제가 대학 시절 상황만 나아지면 다시 연락하자고 미뤘던 사람이 결국 다른 누군가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기분이 떠올랐습니다. 크게 후회하지는 않았는데, 이상하게 한동안 마음 한쪽이 허전했습니다. 이 영화는 그 허전함이 무엇인지를 꽤 정확하게 짚어냅니다.타이밍이 맞지 않는 사랑의 구조우연과 승희는 고등학교 전학생으로 처음 만납니다. 처음에는 서로를 경계하다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고, 그러다 또 멀어집니다. 이 패턴이 영화 내내 반복됩니다.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 즉 이야기가 시간 순서대로 쌓이며 인물의 감정 변화를 보여주는 방식을 이 영화는..
호랑이 영화라고 해서 사냥 액션을 기대하고 봤다가, 끝나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2015년 개봉한 영화 《대호》는 1917년 일제강점기 조선을 배경으로, 사냥꾼 만덕과 백두대간의 마지막 호랑이 산군이 맞닥뜨리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추격전처럼 보였지만, 저는 이 영화에서 끝까지 남는 건 액션이 아니라 자식을 잃은 부모의 감정이라는 걸 마지막 장면에서야 깨달았습니다.상실감 - 원수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때영화를 처음 볼 때 저는 이런 질문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호랑이도 슬픔을 느낄까?" 당연히 느끼겠지, 하면서도 사실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니 그 질문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습니다.산군은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로 일제강점기의 무분별한 해수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