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처음 틀었을 때 그냥 웃기는 시대극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1953년 충남 공주를 배경으로, 가난한 남자가 피를 팔아 살아간다는 설정 자체가 너무 극단적으로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 제가 오래 앉아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허삼관은 웃기면서도 오래 남는 영화였습니다.가족의 의미 — 혈연이 아니라 함께 버텨온 시간영화는 6.25 전쟁 직후 폐허가 된 마을에서 시작됩니다. 주인공 허삼관은 피를 팔아 번 돈으로 동네 인기 미녀 옹난씨에게 냉면과 닭불고기를 사주며 구애에 성공하고, 두 사람은 결혼해 세 아들을 낳습니다. 첫째 일락, 둘째 이락, 셋째 삼락. 행복해 보이는 가정이었습니다.그런데 11년이 지난 뒤 마을에 소문이 퍼집니다. 첫째 일락이가 허삼..
2014년 개봉한 영화 「우아한 거짓말」에서 중학생 천지는 단 한 장의 유서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납니다.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저는 꽤 오래 멍하게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때리거나 욕을 퍼붓는 장면이 아니라, 그냥 조용히 혼자가 되어 가는 과정이 그렇게 무거울 줄은 몰랐거든요.보이지 않는 폭력이 가장 깊이 남는다학교폭력(School Violence)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부분 신체적 폭행이나 직접적인 언어폭력을 먼저 떠올립니다. 여기서 학교폭력이란 학교 안팎에서 학생 사이에 발생하는 신체·정신·재산상의 피해를 주는 행위 전반을 뜻하며,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은 신체폭력뿐 아니라 따돌림·사이버폭력·강요 등도 모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출처: 국가법령정보센터).그런데 영화 속 천지가 겪은 ..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봅니다. 말 잘하고 능력도 있어 보이는 누군가가 중심에 서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 사람 눈치를 보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걸요. 영화 을 보면서 저도 비슷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꼭 검찰청이나 국회가 아니어도, 작은 조직 안에서도 권력의 작동 방식은 놀랍도록 닮아 있었습니다.권력 구조를 보여주는 방식이 달랐다의 주인공 박태수는 전형적인 입지전적(立志傳的) 인물로 시작합니다. 입지전적이란 밑바닥에서 출발해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의 자리에 오른 인물 유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끄러운 곳일수록 집중이 잘 된다는 특이한 체질로 전교 1등을 찍고, 서울대 입학 후 사법고시까지 한 번에 통과합니다. 얼굴까지 출중하니 세상이 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기울어진 것처럼..
가장 나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처음에는 당연히 깡패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친구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정작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모든 판을 설계한 사람들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 훨씬 더 불편하게 남았습니다. 영화 은 그 불편함을 끝까지 놓아주지 않는 작품입니다.권력 구조 — 누가 진짜 판을 짜는가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솔직히 안상구라는 인물이 가장 위험한 존재처럼 느껴졌습니다. 폭력적이고 거칠고, 첫 장면부터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냅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다시 봤을 때 제가 직접 느낀 건, 이 사람이 오히려 가장 아래에 놓인 인물이라는 점이었습니다.영화 속 권력 구조는 크게 세 층위로 나뉩니다. 신정당의 대선 후보 장피로를 정점으로, 조국일보..
《킹메이커》는 2022년 개봉 당시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지만, 평단에서는 근래 보기 드문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또 정치 영화'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앉았다가, 어릴 때 선거철마다 집안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지던 기억이 불쑥 떠올라서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이 영화가 정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인간의 인정 욕구와 그림자 심리를 파고든 작품이라는 게 제 결론입니다.실화 고증의 힘과 한국 영화의 구조적 한계영화는 1960년대 초반 선거판을 배경으로, 실존 인물들의 행보를 놀라울 정도로 촘촘하게 재현합니다. 1967년 목포 선거, 40대 기수론이 폭발하던 신민당 전당대회, 유진산 총재에 대한 당시의 시선, 대선 후보 경선에서 나온 무효표 한 장까지. 제가 직접 관련 역사 자..
경제 영화를 보다 중간에 집중력을 잃어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꽤 자주 그랬습니다. 그런데 블랙머니는 달랐습니다. 복잡한 금융 구조를 설명하는 대신 두 인물의 선택을 따라가게 만들었고, 그 덕분에 끝까지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뒤에는 실제 사건이 궁금해졌습니다.인물 선택 — 경제 영화가 설명을 포기했을 때 생기는 일경제를 다룬 영화에는 공통된 딜레마가 있습니다. 금융 용어와 복잡한 거래 구조를 어디까지 설명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국가부도의 날은 IMF 외환위기라는 거시 경제적 충격을 인물들의 감정과 직접적인 피해를 통해 전달했고, 빅쇼트(The Big Short)는 반대로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 — 즉 신용등급이 낮은 차입자에게 제공된 고위험 주택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