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에 갑자기 백수가 됐을 때, 가장 무너지는 건 통장 잔고가 아니라 "나는 뭐 하는 사람이지?"라는 질문입니다. 영화 는 그 질문을 정면으로 꺼내든 작품입니다. 처음엔 가볍게 봤는데, 어느 순간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제 이야기 같아서요.백수가 된 40대 PD, 배경부터 짚고 가야 합니다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감독인 김초희 씨가 수년간 독립영화 제작 현장에서 PD로 일하다 실직한 뒤, 고향에서 반찬가게를 하려고 짐을 싸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 시절 작품 속 집주인 할머니 역을 맡은 배우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고 다시 일어나, 직접 감독이 되어 자신의 과거를 영화로 만든 것이 바로 이 작품입니다.영화 속 찬실은 오랫동안 지감독과 호흡을 맞춰온 프로듀서(Producer)입니다. 여기서 프로..
진짜 왕이 더 나쁜 왕이었다면, 우리는 그 가짜를 왕으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다시 봤을 때 저는 이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처음 극장에서 볼 땐 그저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이 벌이는 궁중 코미디"로만 봤는데, 시간이 흘러 다시 보니 웃음보다 훨씬 무거운 무언가가 남아 있었습니다. 권력의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그 자리의 무게를 결정한다는 것을요.광해군과 하선, 같은 얼굴 다른 시선 — 시대적 맥락영화의 배경은 조선 중기, 광해군 재위 시절입니다. 역사적으로 광해군은 당쟁과 외교적 위기 속에서 복잡한 선택을 반복했던 군주입니다. 영화 속 광해군은 신하들의 독살 시도를 의심하며 은수저로 독을 확인하는 장면부터 등장합니다. 은수저의 색이 변하..
상을 많이 받은 영화가 반드시 가장 좋은 영화일까요? 솔직히 저도 미나리를 보기 전까지는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에 아카데미까지 거론되는 작품이니 기생충 같은 긴장감과 반전이 있을 거라고 당연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든 감정은 예상과는 꽤 달랐습니다. 이 영화는 거대한 사건 없이도 오래 남는 영화였고, 동시에 왜 이 작품이 이 시점에 이토록 주목받는지 곱씹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이민자 정서: 미국 영화인데 왜 이렇게 한국 냄새가 날까일반적으로 미나리를 한국계 미국인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소개하지만,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조금 달랐습니다. 배경은 분명 1980년대 아칸소 허허벌판이고, 대사도 대부분 한국어인데, 이 영화는 제가 알고 있는 미국 이민자 영화의 문법을 ..
2014년 개봉한 영화 '수상한 그녀'는 개봉 당시 관객 80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웃기고 가벼운 코미디 정도로 생각했는데, 10년이 지나 다시 꺼내 보고 나서는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노인을 바라보는 제 자신의 시선이 얼마나 편향되어 있었는지, 영화 한 편이 그걸 정면으로 짚어줬기 때문입니다.편견 — 우리는 나이로 사람을 먼저 판단한다영화 속 주인공 오말순은 욕 잘하고 잔소리 심한 칠순 할머니로 등장합니다. 가족들 눈에는 그냥 '귀찮은 존재'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사진관에서 갑자기 20대 외모로 돌아온 뒤,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180도 바뀝니다. 달라진 건 겉모습뿐인데, 대우가 완전히 달라지는 겁니다.이걸 심리학 용어로 '연령주의(Ageism)'라고 합니다. 연령주의란 나이를 ..
지쳐서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영화 한 편이 말 한마디보다 더 깊이 닿을 때가 있습니다. 리틀 포레스트가 저한테 그랬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음식이 예쁘게 나오는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힘들었던 시기에 다시 보니 전혀 다른 영화였습니다. 이 글은 지쳐서 뭔가를 쉬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분들을 위해 썼습니다.힐링영화라고만 보면 절반만 보는 겁니다리틀 포레스트를 단순히 힐링영화로 분류하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 표현이 조금 아깝다고 느꼈습니다. 힐링이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가볍고 예쁜 무언가로 소비되기 쉬운데, 이 영화는 그보다 훨씬 구체적인 감정을 건드리거든요. 임용고시에 혼자만 떨어지고, 남자친구와 사이가 멀어지고, 새벽 두 시에 인스턴트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는 주인공 혜원의 ..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상대가 보내는 말과 행동이 호감인지 그냥 친절인지 몰라서 혼자 끙끙 앓아본 적 있으신가요. 저도 대학 시절 그랬습니다. 건축학개론은 바로 그 답답함을 스크린 위에 그대로 꺼내놓은 영화입니다. 일반적으로 첫사랑 영화는 아름다운 감정만 남긴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 영화는 오히려 놓쳐버린 순간들을 먼저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90년대 감성이 소환하는 시대적 배경건축학개론의 과거 파트는 199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 시절 소품들이 등장하는 방식이 꽤 촘촘합니다. 삐삐(무선호출기), 무스 머리, CD 플레이어, 필름 카메라, 그리고 게스 로고가 박힌 청바지까지. 여기서 무선호출기란 스마트폰 이전 세대가 사용하던 단방향 통신 기기로, 상대에게 번호를 남기면 전화를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