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봤던 영화를 어쩌다 다시 틀었다가, 전혀 다른 영화처럼 느껴진 경험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게 였습니다. 처음 봤을 땐 그냥 웃겼습니다. 근데 몇 년이 지나 다시 봤더니, 같은 장면에서 웃음 대신 먹먹함이 먼저 올라왔습니다. 이 글은 그 경험에서 시작합니다.줄거리 - 코미디 포장 안에 감춰진 상실의 이야기2001년 개봉한 는 공익근무 중인 평범한 청년 견우가 지하철에서 술에 취한 그녀를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첫 만남부터 억울하게 유치장까지 끌려가고, 이후에도 그녀의 일방적인 호출에 응하고, 스쿼시·검도 대결에서 매번 얻어맞는 구도가 반복됩니다.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이 장면들이 그냥 코미디 소재라고만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영화는 중반부터 다른 층위를 드러냅니다. 그녀는 ..
솔직히 저는 뷰티 인사이드를 처음 봤을 때 '매일 얼굴이 바뀌는 남자'라는 판타지 설정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다시 보니 제가 놓쳤던 게 많았습니다. 이 영화가 진짜 하려는 말은 설정 그 너머에 있었고, 그걸 뒤늦게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마지막 장면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판타지 설정이 실은 가장 현실적인 질문이었다일반적으로 판타지 장르는 현실과 거리를 두기 위한 장치로 쓰인다고들 알고 있는데, 제 경험상 이 영화는 정반대로 작동했습니다. 주인공 김우진은 자고 일어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의 외형을 가진 채 깨어납니다. 성별도, 나이도, 인종도 달라집니다. 영화 속에서 이 현상을 가리키는 말은 따로 없지만, 심리학 용어로 풀자면 일종의 신체적 정체성 분리(Body Identity Disr..
호랑이 영화라고 해서 사냥 액션을 기대하고 봤다가, 끝나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2015년 개봉한 영화 《대호》는 1917년 일제강점기 조선을 배경으로, 사냥꾼 만덕과 백두대간의 마지막 호랑이 산군이 맞닥뜨리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추격전처럼 보였지만, 저는 이 영화에서 끝까지 남는 건 액션이 아니라 자식을 잃은 부모의 감정이라는 걸 마지막 장면에서야 깨달았습니다.상실감 - 원수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때영화를 처음 볼 때 저는 이런 질문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호랑이도 슬픔을 느낄까?" 당연히 느끼겠지, 하면서도 사실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니 그 질문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습니다.산군은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로 일제강점기의 무분별한 해수구..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처음 틀었을 때 그냥 웃기는 시대극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1953년 충남 공주를 배경으로, 가난한 남자가 피를 팔아 살아간다는 설정 자체가 너무 극단적으로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 제가 오래 앉아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허삼관은 웃기면서도 오래 남는 영화였습니다.가족의 의미 — 혈연이 아니라 함께 버텨온 시간영화는 6.25 전쟁 직후 폐허가 된 마을에서 시작됩니다. 주인공 허삼관은 피를 팔아 번 돈으로 동네 인기 미녀 옹난씨에게 냉면과 닭불고기를 사주며 구애에 성공하고, 두 사람은 결혼해 세 아들을 낳습니다. 첫째 일락, 둘째 이락, 셋째 삼락. 행복해 보이는 가정이었습니다.그런데 11년이 지난 뒤 마을에 소문이 퍼집니다. 첫째 일락이가 허삼..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봅니다. 말 잘하고 능력도 있어 보이는 누군가가 중심에 서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 사람 눈치를 보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걸요. 영화 을 보면서 저도 비슷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꼭 검찰청이나 국회가 아니어도, 작은 조직 안에서도 권력의 작동 방식은 놀랍도록 닮아 있었습니다.권력 구조를 보여주는 방식이 달랐다의 주인공 박태수는 전형적인 입지전적(立志傳的) 인물로 시작합니다. 입지전적이란 밑바닥에서 출발해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의 자리에 오른 인물 유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끄러운 곳일수록 집중이 잘 된다는 특이한 체질로 전교 1등을 찍고, 서울대 입학 후 사법고시까지 한 번에 통과합니다. 얼굴까지 출중하니 세상이 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기울어진 것처럼..
가장 나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처음에는 당연히 깡패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친구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정작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모든 판을 설계한 사람들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 훨씬 더 불편하게 남았습니다. 영화 은 그 불편함을 끝까지 놓아주지 않는 작품입니다.권력 구조 — 누가 진짜 판을 짜는가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솔직히 안상구라는 인물이 가장 위험한 존재처럼 느껴졌습니다. 폭력적이고 거칠고, 첫 장면부터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냅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다시 봤을 때 제가 직접 느낀 건, 이 사람이 오히려 가장 아래에 놓인 인물이라는 점이었습니다.영화 속 권력 구조는 크게 세 층위로 나뉩니다. 신정당의 대선 후보 장피로를 정점으로, 조국일보..